아시아 지역에서 수행하는 다수의 해외 건설 프로젝트의 경우 아시아의 국제금융허브인 싱가포르에 위치한 금융기관으로부터 건설 계약 체결에 필요한 각종 보증 및 프로젝트 파이낸싱 등 중요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시공자는 계약상 발주자에게 공사이행보증(performance bond)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보증을 제공할 의무를 부담하는데, 보증과 관련하여 시공자와 발주자 간에 부당한 청구(unlawful call)를 포함한 다양한 법적 분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시공자의 입장에서는 보증 청구를 당하게 되면 이를 회수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이는 시공자의 cash flow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보증에 적용되는 준거법에 따른 유의사항 등을 사전에 파악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보증계약과 관련하여서는 통상 국제상공회의소의 Uniform Rules for Demand Guarantees(URDG 758) 규정이 적용되는 바, 보증계약 자체에 대한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URDG 758 제34조 제a항에 따라 보증을 발급한 금융기관이 소재한 곳의 준거법이 적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싱가포르에 위치한 금융기관으로부터 보증 증권을 발급받는 경우, 해당 보증계약과 관련한 분쟁 발생 시 싱가포르법이 준거법으로서 적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본 뉴스레터에서는 이행보증 청구에 관한 싱가포르 법제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특히 소위 백차지(back-charges)를 청구하기 위해 이행보증증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련된 최근 싱가포르 고등법원 항소심(Appellate Division of the High Court) 판결의 내용과 그 시사점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이행보증 관련 싱가포르 법제
통상 이행보증계약은 보증인(guarantor), 보증의뢰인(applicant), 그리고 수익자(beneficiary) 간에 체결되는 계약으로서, 보증의뢰인인 주계약자가 계약상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수익자인 발주자가 보증서를 보증인인 금융기관에 제시함으로써 보증인이 수익자에게 보증금액을 지급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이때 건설계약에서 통용되는 이행보증증권(performance bond)은 수익자인 발주자가 보증금액을 청구하는 경우 무조건적으로(unconditional), 별도의 채무불이행 사실에 대한 증빙 없이 단순한 청구만으로 보증인인 금융기관으로부터 보증금을 지급받을 수 있는 on-demand bond의 형태로 발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on-demand bond 성격의 무조건부 이행보증증권은 그 특성상 수익자에게는 유리하나, 보증의뢰인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여러 국가의 법원들은 on-demand bond임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사유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수익자의 보증금 지급 청구 또는 금융기관의 지급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보증의뢰인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 및 홍콩 법원은 보증금 지급을 막을 수 있는 사유를 ‘사기(fraud)’ 또는 계약상 명백한 금지 조항이 있는 경우로 두고 있는 한편, 싱가포르 법원의 경우 영국법보다 다소 완화된 기준에 해당하는 ‘불공정성(unconscionability)’이라는 사유를 별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법원들이 이러한 예외 사유가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엄격한 기준을 통해 판단합니다. 싱가포르 법원 또한 보증의뢰인이 다음과 같은 사유를 소명(show a prima facie case)하는 경우에만 ‘불공정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
■ 수익자의 청구 금액이 과도한 것을 넘어, 수익자의 예상 손해액을 훨씬 초과하는 경우.
■ 보증의뢰인이 계약을 이행하지 못한 원인이 수익자에게 있는 경우.
■ 수익자가 ‘부정한 행위(unclean hands)’를 통하여 손해액을 부풀리거나 선택적이고 불완전한 정보를 근거로 보증금을 청구한 경우.
■ 수익자가 기초 계약과 무관한 목적(ulterior motives)으로 보증금을 청구하거나, 수익자의 청구가 이전에 수익자가 취했던 입장과 모순된 경우.
2. 최근 싱가포르 고등법원 항소심 판결
이와 관련하여 최근 싱가포르 고등법원 항소심 재판부는 무조건부 이행보증증권에 기한 수익자의 보증금 청구를 불공정하다고 보아 금지할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포함한 판결을 내렸습니다(Ee Hup Construction Pte Ltd v China Jingye Engineering Corp Ltd (Singapore Branch) and another [2025] SGHC(A) 3).
이에 대해 아래에서 좀 더 상세하게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사실관계
시공자인 China Jingye Engineering Corporation Limited (Singapore Branch)(CJY)는 Ee Hup Construction Pte Ltd (EH)와 하도급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에 EH는 하도급계약에 따라 CJY를 수익자로 하는 무조건부 이행보증증권을 싱가포르 소재 금융기관을 통해 발행하였습니다(이 사건 이행보증증권).
이후 CJY와 EH 간에 공사대금 지급의무와 관련하여 다툼이 발생하였고, EH는 싱가포르의 건설 산업 지급보장법(Building and Construction Industry Security of Payment Act(SOPA))에서 규정하는 adjudication proceeding을 통해 CJY를 상대로 공사대금 지급을 청구하였습니다. 이때 SOPA에서 규정하고 있는 adjudication proceeding이란 건설계약에서 발생하는 공사대금 지급 분쟁을 신속하게 해결하고 특히 하도급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적인 목적하에 도입된 강행법규적 절차로서, 당사자들이 계약상 소송 또는 중재 등 다른 분쟁 해결 절차에 합의하였다고 하더라도 이에 우선하여 적용됩니다. 나아가 adjudicator가 내린 결정은 계약상 명시된 최종적인 분쟁 해결 절차를 통한 판결 내지는 판정을 받을 때까지 당사자들을 구속하며 집행 또한 가능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EH는 CJY를 상대로 adjudication proceeding을 통해 공사대금을 청구하였고, 시공자인 CJY는 공사 도중 하도급자인 EH의 귀책사유로 발생한 CJY의 손해, 소위 백차지(back-charges)를 청구하여 EH의 공사대금과 상계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CJY는 adjudication proceeding 진행 도중 이러한 백차지 청구를 철회하였고, 결국 adjudicator는 CJY의 백차지에 대한 별도의 상계 없이 EH의 청구를 전부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CJY는 이 사건 이행보증증권의 행사를 통해 앞서 adjudication proceeding 도중에 철회한 백차지의 지급을 청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EH는 CJY가 adjudication proceeding 도중에 이미 철회한 백차지 관련 클레임을 다시 이행보증증권을 통하여 청구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싱가포르 법원에 CJY의 지급 청구를 금지해달라는 소를 제기하였습니다.
싱가포르 고등법원의 1심 재판부(General Division of the High Court)는 이러한 EH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EH는 항소하였습니다.
2) 싱가포르 고등법원의 판시사항
결론적으로 싱가포르 고등법원의 항소심 재판부 또한 EH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EH의 항소를 기각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EH가 지급금지청구의 근거로 제시한 S사 사건([2019] SGHC 267)에 주목하였습니다. 먼저 재판부는 이행보증증권에 기한 지급 청구가 동일한 분쟁사항에 대한 adjudication decision을 무력화시키는 경우에는 지급 청구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S사 사건과 그 견해를 같이하였습니다. 다만, 항소심 재판부는 실제로 이행보증증권의 행사가 adjudication decision에 반하는지 여부는 개별 사건의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먼저 항소심 재판부는 S사 사건에서는 adjudication decision에서 이미 기각된 청구를 근거로 수익자가 이행보증증권의 지급을 청구한 반면, 본건의 경우 CJY가 adjudication proceeding 중에 백차지 청구를 철회하여 adjudicator가 백차지 청구에 대한 어떠한 실질적인 판단도 내린 바 없다는 측면에서 본건과 S사 사건의 사실관계와 구별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점을 근거로 항소심 재판부는 EH와 CJY 간의 adjudication proceeding에서 CJY의 백차지 청구에 대하여 어떠한 결정도 내려진 바 없으므로 CJY가 동일한 백차지 클레임을 근거로 이행보증증권의 지급을 청구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불공정한 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하였습니다. 이를 이유로 항소심 재판부는 EH가 제기한 이행보증증권 청구 금지 신청을 기각하였습니다.
3. 시사점
이번 판례는 싱가포르 법원이 SOPA상의 adjudication proceeding에서 판단된 쟁점이 이행보증증권의 청구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여부를 정교하게 구분하여 판시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공사 대금 관련 분쟁에서 adjudication decision을 통해 공사 대금의 지급 여부가 확정된 경우에도, 해당 결정에서 다투지 않은 백차지가 있다면 수익자는 여전히 이를 근거로 이행보증증권을 행사하여 백차지를 청구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이는 한국 건설사들이 싱가포르에서 하도급자들에게 백차지를 청구하려고 하는 경우 분쟁 해결 전략을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이행보증증권을 보유하고 있는 건설사로서는 adjudication proceeding 중에 하도급자를 상대로 백차지를 통해 상계를 주장하기보다는, 이를 근거로 이행보증증권을 행사하여 백차지를 지급받은 후 추후 소송 또는 중재 등 종국적인 분쟁 해결 절차를 통해 백차지 청구 권한에 대해 다투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adjudication proceeding에서 백차지 청구 권한이 기각된 경우, 추후 이에 관한 이행보증증권 청구도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보증증권의 지급 청구 및 부당한 지급 청구(unlawful bond call)와 관련된 각국의 법체계는 한국 건설사들의 이해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한국 건설사들은 이행보증증권의 발행 및 분쟁 발생 시 적용되는 준거법을 꼼꼼히 살펴 선제적으로 보증증권과 관련된 법리적 대응 전략을 상세히 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법무법인(유) 광장의 해외건설팀은 다양한 해외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종합적인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며, 해외건설법무에 능통한 전문 변호사들이 입찰 및 계약 조건 검토를 위한 자문 단계부터 프로젝트 진행 중에 발생하는 클레임 단계에서의 대응, 분쟁이 발생할 경우 소송과 중재 등 분쟁의 해결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별로 유기적인 연계를 통한 원스톱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여 드립니다. 이와 관련하여 도움이 필요하신 경우 언제든지 법무법인(유) 광장의 해외건설팀 관련 전문가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각주]
1. Sulzer Pumps Spain, SA v Hyflux Membrane Manufacturing (S) Pte Ltd [2020] SGHC 122; CEX v CEY [2020] SGHC 100
2. 본건의 경우 하도급자인 SLH가 시공자인 S사를 상대로 adjudication proceeding을 통해 공사대금 지급을 청구하였고, 본 절차에서 SLH의 공사대금 지급 청구는 인용되었음. 이후 S사는 이러한 adjudication decision에도 불구하고 이미 adjudication decision을 통해 기각된 주장을 근거로 이행보증증권에 대한 지급을 청구함. 이에 SLH는 이러한 S사의 이행보증증권 지급 청구가 위법하다고 주장하며 지급 청구 금지 가처분을 제기하였고, 싱가포르 법원은 SOPA에 따른 adjudication proceeding 제도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들어, adjudication decision의 내용에 반하는 S사의 이행보증증권 지급 청구는 허용될 수 없다고 보아 지급 청구 금지 가처분을 인용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