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법원은 국제 거래 계약에서 복수의 언어로 규정된 중재 조항의 일부 문언이 모호하고 상충되거나, 존재하지 않는 중재 기관이나 중재인을 지정하는 등 중재 조항에 다소간의 흠결이 있다고 하여도 장래 분쟁을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겠다는 당사자 간의 합의가 인정된다면 유효한 중재 합의가 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대법원 2025.1.23. 선고 2024다243172 판결). 본 뉴스레터에서는 해당 판결의 주요 내용을 분석하고, 그 시사점을 살펴보겠습니다.
1. 사실관계
이 사건의 쟁점이 된 공급계약은 대한민국 회사인 원고가 독일 회사인 피고로부터 설비를 공급받기 위하여 체결된 계약이며, 원고는 피고에게 지급한 물품대금의 반환을 구하는 소송을 한국 법원에 제기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공급계약서에 "이 계약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모든 분쟁을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기로 하는 전속적 중재합의가 있으므로, 이 사건 소는 부적법하여 각하되어야 한다"는 관할 항변을 하였습니다. 피고가 전속적 중재합의에 해당한다고 주장한 조항(이하, "이 사건 조항")은 아래와 같습니다.
“8. 통제 법률(Arbitration)
본 합의는 한국 법률이나 국제 사법 재판 중재위원회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All disputes, controversies, Claims or Difference arising out of, or in relation to this agreement, or a breach thereof shall be finally settled by Korean law or in accordance with the Commercial Arbitration committee of International Commercial Law.”
2. 법원의 판단
1) 원심의 판단
원심인 서울고등법원은 전속적 중재합의가 존재한다는 피고의 위와 같은 주장을 배척하였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24.4.24. 선고 2023나2046426 판결). 원심은 먼저 이 사건 조항을 “한국 법률의 통제 또는 국제사법재판중재위원회의 통제”를 당사자들이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따라서, “한국 법률의 통제” 부분은 당사자들의 준거법에 대한 합의에 해당하는 동시에 대한민국 법에 따른 재판청구를 하겠다는 당사자들의 의사를 규정한 것이고, “국제사법재판중재위원회의 통제” 부분은 중재에 따른 분쟁 해결을 하겠다는 당사자들의 의사를 규정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나아가 원심은 (i) 국문의 “~이나”와 영문의 “or” 부분이 오기에 해당한다고 인정되지 않으므로 이 사건 조항의 접속사가 “또는”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점, (ii) 당사자들이 국제사법재판중재위원회와 같이 존재하지도 않는 중재 기관을 명시할 정도로 중재 절차에 관하여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점에 비추어 보면, 분쟁 해결 수단이 중재에 한정된다고 인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점, (iii) 분쟁 해결의 수단으로써 재판 청구를 배제한다는 문구를 당사자들이 포함시키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였습니다. 따라서 법원은 이 사건 조항은 상대방이 중재 제기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중재 절차에 임하였을 때에 비로소 효력이 있는 “선택적 중재 조항”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2) 대법원의 판단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사건 조항이 전속적 중재 합의로서 유효하다는 점을 인정하였습니다.
우선 대법원은 이 사건 조항의 영문 표제는 중재를 의미하는 "Arbitration"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영문 조항에는 "shall be finally settled by […] Arbitration"이라는 문구가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어 계약 당사자들이 분쟁을 중재를 통해 해결하기로 합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나아가 대법원은 (i) “한국 법률의 통제” 부분은 그 문언의 내용과 체계에 비추어 준거법에 관한 합의로만 읽히고 재판 절차를 포함한 대한민국 법에 따른 분쟁 해결 수단을 수용한 합의로 보여지지 않는 점, (ii) 중재 조항에서 언급하는 특정 중재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분쟁을 중재로 해결하겠다는 당사자들의 의사가 명확하면 중재 합의는 유효한 점, (iii) 재판 절차를 분쟁 해결의 수단에서 배제한다는 문구를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하여 선택적 중재 조항에 합의한 것이라고 당사자들의 의사를 해석할 수 없는 점 등을 들어 이 사건 조항은 전속적 중재 합의에 해당한다고 판시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각하하였습니다.
3. 시사점
대법원은 이전에도 비록 중재 조항에 중재 기관, 준거법이나 중재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중재 조항의 해석을 통해 장래 분쟁을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겠다는 의사가 인정되는 한 중재 합의로서의 효력이 인정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해왔습니다(대법원 2007.5.31. 선고 2005다74344 판결).
다만, 이번 판결에서는 더 나아가 중재 조항의 일부 문언이 모호하고 상충되거나, 존재하지 않는 중재 기관이나 중재인을 지정하는 등 중재 조항에 다소간의 흠결이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사정만으로 유효한 중재 합의가 아니라고 쉽게 단정하여서는 안된다고 판시하였습니다. 즉, 이번 판결은 복수의 언어가 상호 일부 내용이 일치하지 않아 중재 합의로 보기에 비록 다소 흠결이 있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당사자들이 중재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겠다는 의사가 인정되는 한 중재 합의로서의 효력을 인정한 것이라고 평가됩니다.
또한 대법원은 당사자들이 계약서에 중재에 관한 조항을 별도로 둔 사정은 분쟁을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겠다는 당사자들의 의사를 추단하는 유력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보아 더욱 더 중재 친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한국 법원이 국제 중재의 활성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대법원 판결은 다소 흠결이 있는 중재 합의의 유효성을 판단하는 기준에 있어 의미 있는 결정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선택적 중재 조항을 분쟁 해결 수단으로 사용하기를 원하는 당사자들에게는 그 선택적 중재 조항이 전속적 중재 합의로 해석되지 않기 위하여 어떠한 점을 유의해야 하는지에 관하여도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고 보여집니다.